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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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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백기만 등과 대구 3 · 1운동거사 당시 학생운동 배후조종, 선전문 등사 · 배포 등으로 활동함. 사전에 주요 인물이 검속되어 서울 서대문구 냉동 92번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1923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학살에 분노, 이듬해 3월 귀국.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고향 친구 박태원의 죽음을 두고 쓴 시 「이중의 사망」(<백조> 3호) 발표.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 단체인 <파스큘라> 결성

1925

<파스큘라>가 개최한 천도교기념관에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 낭독. 8월 박영희, 김기진등과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

1926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70호) 발표.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 주간.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을 발표

1928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ᄀ당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당시 상화는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에 있었다). 상화는 이 시기에 자기 집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하였으며, 수많은 항일 인사들이 출입

1936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행.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3개월 유람한 후 귀국

1937

귀국 후 경찰에 구금되어 20여 일 심한 고초를 겪음.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 작사. 대구시 중구 종로2가 72번지로 이주

1939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와 보관중이던 고월 유고까지 압수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