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의 시

나는 해를 먹다
19/04/29 17:53:00 관리자 조회 3956

나는 해를 먹다

                                                 -이상화-

 

구름은 차림옷에 놓기 알맞아 보이고

하늘은 바다같이 깊다라- ㄴ하다.

 

한낮 뙤약볕이 쬐는 지도 모르고

온몸이 아니 넋조차 깨운-아찔하여지도록

뼈 저리는 좋은 맛에 자스러지기는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果樹園)의 목거지다.

 

배추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도

푸른빛이 비치어 생기를 띠고

더구나 가슴에는 깨끗한 가을 입김을 안은 채

능금을 바수노라 해를 지우나니.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발을 뻗기도 하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어 수줍어하는

탐스럽게도 잘도 익은 과일을 찾아

위태로운 이 짓에 가슴을 조이는 이때의 마음 저 하늘같이 맑기도 하다.

 

머리카락 같은 실바람이 아무리 나부껴도

메밀꽃밭에 춤추던 벌들이 아무리 울어도

지난날 예쁜 이를 그리어 살며시 눈물지는,

그런 생각은 꿈밖에 꿈으로도 보이지 안는다.

 

남의 과일밭에 몰래 들어가

험상스런 얼굴과 억센 주먹을 두려워하면서.

하나 둘 몰래 훔치던 어릴 적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자.

그립고 우습고 죄 없던 그 기쁨이 오늘에도 있다.

 

부드럽게 쌓여 있는 이랑의 흙은

솥뚜껑을 열고 밥 김을 맡는 듯 구수도 하고

나무에 달린 과일-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 같이

입안에 맑은 침을 자아내나니.

 

첫가을! 琴湖江 굽이쳐 흐르고

벼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두 볼이 비자웁게 해 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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