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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문] 이상화 ‘빼앗긴 들’ 은 “남구 앞산 밑”
19/03/21 15:07:30 관리자 조회 2696
동생 이상백 박사 1962년 3월 동아일보 기고문에 적시 인물연구 서태영씨가 찾아내

남구청 “대응책 마련” 지시 수성구는 사실관계 파악 나서

 

 

 

이상화의 동생 상백이 쓴 기고문 말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앞산 보리밭의 실감’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다. 인물연구가 서태영씨 제공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배경이 지금까지 알려진 대구 수성구 들안길이 아니라 남구 앞산 밑이라는 자료가 나왔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연구가 서태영(51·인물갤러리 이끔빛 대표)씨는 이상화의 동생 이상백 전 서울대 교수가 1962년 3월 11일 동아일보 기고문 ‘내 고향의 봄 대구’에서 형 이상화가 묘사한 ‘빼앗긴 들’이 ‘앞산 밑 보리밭’이라고 적시한 자료를 찾아냈다고 29일 밝혔다. 이상백 박사는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사중(舍中)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다. 그러다보니 달성공원에 세워진 상화시비가 어찌 되었는지? 금년에 틈을 타서 한번 가 보아야겠다”고 썼다.

서씨는 “앞산 밑 보리밭에 대한 기록은 지역 신문의 한 칼럼에서도 확인된다”고 밝혔다. 해당 칼럼에서는 ‘1960년대 말까지 앞산에 가려면 시내에서부터 걸어갔다. 굳이 버스를 타면 명덕네거리에서 내려야 했다. 산 아래는 온통 보리밭이었다. 지금의 점보맨션, 개나리, 파크 아파트가 바로 그 자리다’라고 적고 있다.(매일신문 권영재 칼럼) 

영남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이상화 연구논문을 쓰는 등 현대 문학사를 전공한 이동순 교수는 “동생 이상백 박사의 기고문에 형님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묻어난다. ‘빼앗긴 들’ 시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사연과 배경을 동생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까지 수성구 들안길로 잘못 알려져 있던 사실을 바로잡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발견된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문학사적으로 작품의 배경과 공간이 다른 곳으로 해석되는 일이 많은데 이 자료를 통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향토 사학자들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까지 이상화가 살던 중구 대신동 집을 벗어난 대구성밖 들판은 모두 ‘수성들’로 불렸다. 당시 성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달성군 수성면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구 앞산 밑의 미군부대와 카페골목도 모두 보리밭이었다. 따라서 이상화의 ‘빼앗긴 들’ 역시 남구 앞산 부근 보리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지역 학계의 중론이다. 

자료를 발견한 서씨는 “빼앗긴 들이 수성구가 아니라는 소수의 설이 있어 남구와 관련한 자료를 추적하던 중 이상백의 칼럼을 발견하게 됐다”며 “이상화 시인의 대표 시로 평가받고 있는 ‘나의 침실로’에도 ‘앞산’이 등장해 이상화 시인이 읇은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 가르마 같은 논길’은 앞산자락 들판으로 이해된다”고 밝혔다.
 

‘빼앗긴 들’이 들안길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자 임병헌 대구 남구청장은 이날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이상화 관련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수성구청은 사실관계 파악에 나섰다. 수성구청은 빼앗긴 들을 들안길로 판단한 근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안길로 생각하고 있어서 상화동산을 만들고 이상화 문학제를 열어 왔다”고 설명했다.
 

앞산은 1915년 1월15일(음) 윤상태, 서상일 선생 등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한 항쟁의 고향이기도 해 ‘빼앗긴 들’에 대한 정확한 위치 정립과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김종현기자 opl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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