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의 분노와 저항

Sanghwa Memorial Association

1923년 관동대학살 사건으로...

1923년 3월 상화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입학한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했다.
같은 해 9월 백조 3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고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발발로 프랑스행이 좌절된 채 이듬해 3월 귀국했다.
이때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무려 6천 명(일설에는 2만여 명)이 넘는 한국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한 가운데 일본인은 거리를 방랑하는 한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무참히 학살했다.
이것은 ‘관동대학살’ 사건으로 명명할 만큼 대참사였다. 이상화는 학살당하는 한국인의 시신 앞에서 절규하며 무너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이상화의 내면은 이미 불변의 것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이상화는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서 기거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1923년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파스쿨라>를 결성했고, 1925년 8월 박영희, 김기진 등과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 70호에 발표했다.

1928년 6월 대구에서 'ᄀ당사건'이 터졌다.

이런 가운데 1928년 6월 대구에서 이른바 한글의 첫 글자를 딴 ‘ᄀ당사건’이 터졌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차용, 장원택 등이 달성군 둔산리에 사는 부호를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을 맡고있었던 이상화는 이 사건으로 동지 9명과 함께 구금 송치(고등경찰요사 p244)되어 말 못할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 후 1936년 맏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남경 등지를 주유(周遊)하고 귀국했으나 곧바로 경찰에 구금되어 다시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37년 구금에서 풀리자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에 복직하여 조선어, 영어, 작문 교사로 일하며 교남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이것이 또 문제가 되어 가택을 수색당하면서 자신의 시 원고와 보관 중이던 고월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했다.
1939년 이상화는 교남학교를 나와 문학에 열중하였으나 위암 악화로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향년 43세의 일기로 《국문학사》를 저술하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한 채
1939년 이래 살아온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1917

대구에서 백기만, 현진건 등과 '거화' 동인에 참여했다 하나 확인되지 않음

1922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 홍사용, 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 도일하여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 입학

1923

3월 '아테네 프랑세' 수료, 「나의 침실로」(<백조> 3호) 발표,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학살에 분노, 이듬해 3월 귀국. 서울 가회동 소재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 고향 친구 박태원의 죽음을 두고 쓴 시 「이중의 사망」(<백조> 3호) 발표.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 단체인 <파스큘라> 결성

1925

<파스큘라>가 개최한 천도교기념관에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 낭독. 8월 박영희, 김기진 등과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

1926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70호) 발표.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 주간.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을 발표.

1930

「대구행진곡」(<별건곤(別乾坤)> 10월호) 발표

1933

「반딧불」, 「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신가정> 10월호) 발표

1935

시 「역천」(<시원> 2호), 「나는 해를 먹다」(<조강> 2호) 발표

1940

김소운 번역의 「조선시집」(河出書房)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됨

1941

시 「서러운 해조」(<문장> 25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