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세상에는 바르지 않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앞세워 이익을 도모하고, 그 상태로 아무런 반성이 없이 오랜 세월을 경과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진실인 듯 그 나름대로의 권위마저 얻게 된다.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진보하고 정의롭게 바뀌며 발전한다는 것은 각종 비리를 과감하게 몰아내고 신속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은 항시 중요한 과제로 놓여있다.
대구출신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이 남긴 전체 시작품은 도합 60여 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문학사에서 상화의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영원불멸이요, 고전이다. 그 까닭은 상화의 초기 시세계가 1920년대 시창작풍토의 일반적 흐름이었던 몽상적, 퇴폐적 성향에 휩쓸려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였으나 이후 치열한 내면적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겪으며 마침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빛나는 시정신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분단된 국토에서 모든 것이 둘로 갈라지던 험악한 시기에서도 상화의 시작품은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놀라운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상화의 시를 평가하는 방법이나 분위기는 남과 북이 사뭇 달랐다. 남쪽은 ‘나의 침실로’ 계열의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을 선호했음에 비해 북쪽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한 현실주의 계열 시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쪽의 경우도 4.19민주혁명 이래로 현실과 사회, 역사라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갖게 되면서 상화 시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에 신선한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인의 고향 대구광역시에서는 2005년부터 대구 수성구청이 주관하는 상화문학제(相和文學祭)가 시작돼 올해로 열두 해째를 맞고 있다. 수성구의 수성문화원이 이 행사를 주관해온 까닭은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을 수성구 들안길 일대(옛 수성 들판)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검토해야할 매우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것은 상화 시인의 절창 ‘빼앗긴 들’이 만들어진 공간배경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 장소는 수성못 일대가 아니라 대구 남구 대명동 일대의 앞산 밑 보리밭이었다는 놀라운 증언이 새로 발굴됐기 때문이다.
시인의 아우였던 이상백(李相佰, 1904~1966) 박사가 발표한 칼럼 ‘꿈같이 희미한 기억’(동아일보, 1962.3.11.)이란 글에서 ‘사중(舍仲)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다’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수성구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수성들판설이 완전한 왜곡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상백 박사는 형을 포함하여 대구지역 또래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 ‘거화(炬火)’라는 이름의 시동인지를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문학에 돈독한 뜻읋 지녔던 문학청년이었다.
형의 창작세계와 여러 배경에 대하여 아우는 항시 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터이다. 수성구청의 판단은 아무런 구체적 사료나 물증이 없이 다만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민족문화의 보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확실한 창작배경이 밝혀졌으니 당시 보리밭이 있었던 장소, 대구 남구 앞산 밑 적절한 곳에 정식으로 그 사연과 배경을 적은 시비(詩碑)를 건립해야 마땅하다.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 밑에 위치한 미군비행장은 1920년 일제가 경비행장 활주로를 닦고 전쟁에 대비하여 탄약고 따위를 설치해 운영하던 곳이다. 상화 시인이 1926년 무렵 이 일대 보리밭을 자주 산책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군사기지로 전락되어가는 고향의 파괴와 훼손, 유린현장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을 터이고, 그 과정에서 시인은 깨달은 지식인으로서의 아프고 따가운 내면적 고뇌와 직면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였다.
수성구에서는 비록 왜곡된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해서 여러 해째 운영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상화의 문학정신과 그 유산은 전체 대구시민과 한국인의 공동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화축제가 수성구의 전유물로 운영되고 독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과 모티브가 명쾌하게 밝혀졌으므로 전체 대구시민과 관계기관 모두가 합심 단결해 상화의 문학정신을 되새기고 현양하는 일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실천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바르지 않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앞세워 이익을 도모하고, 그 상태로 아무런 반성이 없이 오랜 세월을 경과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진실인 듯 그 나름대로의 권위마저 얻게 된다.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진보하고 정의롭게 바뀌며 발전한다는 것은 각종 비리를 과감하게 몰아내고 신속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은 항시 중요한 과제로 놓여있다.
대구출신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이 남긴 전체 시작품은 도합 60여 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문학사에서 상화의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영원불멸이요, 고전이다. 그 까닭은 상화의 초기 시세계가 1920년대 시창작풍토의 일반적 흐름이었던 몽상적, 퇴폐적 성향에 휩쓸려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였으나 이후 치열한 내면적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겪으며 마침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빛나는 시정신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분단된 국토에서 모든 것이 둘로 갈라지던 험악한 시기에서도 상화의 시작품은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놀라운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상화의 시를 평가하는 방법이나 분위기는 남과 북이 사뭇 달랐다. 남쪽은 ‘나의 침실로’ 계열의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을 선호했음에 비해 북쪽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한 현실주의 계열 시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쪽의 경우도 4.19민주혁명 이래로 현실과 사회, 역사라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갖게 되면서 상화 시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에 신선한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인의 고향 대구광역시에서는 2005년부터 대구 수성구청이 주관하는 상화문학제(相和文學祭)가 시작돼 올해로 열두 해째를 맞고 있다. 수성구의 수성문화원이 이 행사를 주관해온 까닭은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을 수성구 들안길 일대(옛 수성 들판)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검토해야할 매우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것은 상화 시인의 절창 ‘빼앗긴 들’이 만들어진 공간배경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 장소는 수성못 일대가 아니라 대구 남구 대명동 일대의 앞산 밑 보리밭이었다는 놀라운 증언이 새로 발굴됐기 때문이다.
시인의 아우였던 이상백(李相佰, 1904~1966) 박사가 발표한 칼럼 ‘꿈같이 희미한 기억’(동아일보, 1962.3.11.)이란 글에서 ‘사중(舍仲)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다’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수성구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수성들판설이 완전한 왜곡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상백 박사는 형을 포함하여 대구지역 또래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 ‘거화(炬火)’라는 이름의 시동인지를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문학에 돈독한 뜻읋 지녔던 문학청년이었다.
형의 창작세계와 여러 배경에 대하여 아우는 항시 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터이다. 수성구청의 판단은 아무런 구체적 사료나 물증이 없이 다만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민족문화의 보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확실한 창작배경이 밝혀졌으니 당시 보리밭이 있었던 장소, 대구 남구 앞산 밑 적절한 곳에 정식으로 그 사연과 배경을 적은 시비(詩碑)를 건립해야 마땅하다.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 밑에 위치한 미군비행장은 1920년 일제가 경비행장 활주로를 닦고 전쟁에 대비하여 탄약고 따위를 설치해 운영하던 곳이다. 상화 시인이 1926년 무렵 이 일대 보리밭을 자주 산책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군사기지로 전락되어가는 고향의 파괴와 훼손, 유린현장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을 터이고, 그 과정에서 시인은 깨달은 지식인으로서의 아프고 따가운 내면적 고뇌와 직면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였다.
수성구에서는 비록 왜곡된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해서 여러 해째 운영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상화의 문학정신과 그 유산은 전체 대구시민과 한국인의 공동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화축제가 수성구의 전유물로 운영되고 독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과 모티브가 명쾌하게 밝혀졌으므로 전체 대구시민과 관계기관 모두가 합심 단결해 상화의 문학정신을 되새기고 현양하는 일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실천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라 하겠다.